감독 김건희는 자신이 나고 자란 서울 영등포의 풍경을 오랫동안 주목해 왔다. 그곳은 작가에게 태초의 공간, 수수께끼 같은 역사의 현장, 비가시적 존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미지, 세월의 단층과 시간의 혼종이 동시 발생하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수많은 여성 노동자가 영등포의 방직공장으로 강제 동원됐다. 일명 여공들. 우리는 그녀들에 관해 알지 못한다.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 채 익명으로, 그저 무수한 얼굴의 무의미한 일부로만 남아 있는 여공들은 역사의 어렴풋한 흔적과 얼룩일 뿐이다. 해방 이후, 영등포의 공장이 있던 자리에는 미군 부대가 들어섰고 앞선 여공들의 자리는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또 다른 여성 노동자들로 채워졌다. 물론, 뒤따른 여공들에 관해서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여공의 밤>은 이 지워지고 가려진 여성들의 역사를 수면 위로 건져 올리고 싶다. 당사자들의 구술 인터뷰, 다양한 아카이브 영상과 사진, 인용되고 발췌된 텍스트, 자막으로 전해지는 작가의 전언까지. 여기에 더해 영화는 서서히 현재의 영등포의 풍경으로 시선을 옮긴다. 모텔촌과 골목, 철물점과 기계공구 상가가 모여 있는 시장, 낡은 주택단지, 그와 대조되는 거대한 복합쇼핑센터. 이 모든 게 영등포이고 <여공의 밤>이다. 유실되고 잊힌 누군가의 지난 삶, 기억, 영화가 기나긴 세월을 관통해 다시 만나 살아난다.
정지혜 / 서울독립영화제2023 예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