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산 위에 당집이 있었다 하여 ‘당산’이라 불리게 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는 도시 재개발의 무력 앞에서 기록되지 못하고 소리없이 소멸하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욕망은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다. 영화는 아파트 사이에서 불안하게 서 있는 500여년을 산 나무를 경유해 현대 3차 아파트의 풍경, 주변의 쇠락해 가는 골목길과 폐허가 된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 주변을 유영하며 사적 기억과 역사를 연결시키려 한다. 그런데 공간의 역사를 밀어버리고 무지막지하게 세워지는 건물들과 현재 소멸해 가는 근과거의 낡은 공간들의 풍경은 서로 대비된다기 보다는 일종의 공통적인 정서와 태도를 내포하고 있는데, 이는 최근 공간을 다루는 다큐멘타리들이 일반적으로 차용하고 있는 1인칭의 정서구조 – 존재의 붕괴와 불안, 그리고 무력감이라는 감정이다.
<당산>의 이미지들을 관통하는 이 정서는 특별히 개인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근대 혹은 탈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체험되는 존재의 뿌리 뽑힘과 근거 상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같은 역사적, 집합적, 구조적인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당산, 자신의 고향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욕망은 ‘출처 없는 눈’들을 통해 경험적 또는 가상적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용도를 알 수 없었던 폐허가 사실은 일본 식민지 시대 노동자들로 가득찼던 공장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하고, 당산의 한 공사장에서는 한국전쟁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포탄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는 결코 ‘고향’ 혹은 ‘집’에 대한 근원적인 열망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파워포인트 페이지처럼 이어지는 박제된 풍경의 이미지들은 ‘고향’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시뮬라르크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한다.
아파트 사이에서 시멘트로 지탱되고 있는 오래된 나무처럼 영원히 변형된 순수를 우리는 애도해야 하는 것일까, 이 순환되는 비극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어쩌면 모든 곳이 ‘당산’인 남한에서 이 질문은 작가와 관객 모두에게 던져진 숙제일 것이다.
김동령